천년고찰 전통사찰 봉원사의 역사를 소개합니다.
봉원사(奉元寺)는 신라(新羅) 51대(代)(서기 889년) 진성여왕(眞聖女王) 3년에 도선국사(道詵國師) (827-898년)가 현 연세대(연희궁)터에 처음으로 지었던 것인데 이후 고려시대에는 고려말 공민왕대에 활약한 태고(太古) 보우(普愚)스님이 크게 중창하여 도량을 화려하고 아름답게 조성하여 당시 사람들로 부터 크게 찬탄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이후 조선의 태조 이성계는 한산군(韓山君)이 이색(李穡)에게 명하여 태고국사의 비문을 짓게 하고 스스로 국사의 문도(門徒)임을 자처하여 봉원사에 그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며, 태조 5년(1396)에는 원각사(圓覺寺)에서 삼존불을 조성하여 봉원사에 봉안하였고, 태조 사후에는 전각을 세워 태조의 어진(御眞)을 봉안하였다.
제14대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당시 전각이 소진됨에, 17대 효중 2년(1651) 지인(智仁)대사가 중창하였으나 동, 서 요사채가 다시 소실되어 극령(克齡), 휴엄(休嚴) 두 스님에 의해 중건되었다.
제21대 영조 24년(1748) 찬즙(贊汁), 증암(增岩) 두 스님에 의해 지금의 터전으로 이전하였고, 영조는 친필로 봉원사(奉元寺)라 현액하였으며, 신도들 사이에는 이때부터 새로 지은 절이라 하여 '새절'이라 부르게 되었다.
제22대 정조 12년(1788)에는 전국의 승려의 풍기를 바로잡기 위한 8도승풍규정소(八道僧風糾正所)가 설치되었으며, 제25대 철 종 6년(1856) 은봉(銀峯), 퇴암(退庵)화상 등이 대웅전을 중건하였다.
제26대 고종 21년(1884) 발생한 갑신정변(甲申政變)의 주축을 이룬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 개화파 인사의 정신적 지도자였 던 이동인(李東仁) 스님이 5년간 주석하였던 갑신정변의 요람지이기도 했다.
고종 31년(1894) 주지 성곡(性谷)스님이 약사전을 건립하였으나 소실되었다.
1899년 인천 감옥에서 탈옥한 백범 김구 선생(법명 원종)이 공주 마곡사를 떠나 서울 서문 밖 이곳 새절(지금 봉원사)에 머물면서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형세를 살폈다. 새절에서 인연이 닿은 사형(師兄) 혜정(慧定)스님과 동행해서 평양으로 가서 부모님과 해우했다.
1911년 주지 보담(寶潭)스님의 중수와 사지(寺地)의 확보로 가람의 면모를 새롭게 하였다.
1945년 주지 기월(起月)스님과 대중의 원력으로 광복기념관을 건립하였다.
1948년 백범 김구 선생이 봉원사를 다시 방문하였다.
1950년 9월 28일 서울 수복 당시 병화(兵火)로 광복기념관이 소진되었고 이때 영조의 친필 현판 등 사보와 이동인 스님 및 개화 파 인사들의 유물이 함께 소실되었다.
1966년 주지 영월(映月)스님과 대중의 원력으로 소실된 염불당(念佛當)을 중건하였는데 이 건물은 대원군(大院君)의 별처였던 아소정(我笑亭)을 헐어 옮긴 것이다.
1991년 32세 주지 김성월 스님과 사부대중의 원력으로 삼천불전 건립도중 대웅전이 소진됨에 즉시 중건을 시작하여 1994년 주 지 혜경(慧鏡)스님과 사부대중의 원력으로 대웅전을 복원 낙성하였고 같은 해 1,100평 규모의 삼천불전을 새로이 건립하였다.
2009년 9월 30일 아랍에미리트 세계유네스코 정부간 위원회 4차 회의에서 영산재가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이 되었다.
2011년 전통사찰로 등록되었다.
2014년 7월 서울시유형문화재 제 363호 아미타괘불도와 제 364호 범종이 문화재로 등록되었다.
현재 봉원사는 한국불교의 전통 종단인 태고종의 총본산으로서 전법수행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바 대중은 50여스님, 신도는 10만을 헤아리며, 국가무형문화재 제48호(단청) 이만봉 스님과 제50호(범패) 영산재보존회에서 단청과 범패분야의 후학을 지도하고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옥천범음대학, 불교교양대학이 있고, 신행 단체로는 관음회, 화엄법회, 청년회, 학생회, 인경회, 거사림 등 법회가 개최 되고 있으며, 대외적으로도 교도소, 소년원, 양로원, 고아원, 군부대 등을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교화활동을 펼치고 있어 태고종 총본산으 로서 그 소임을 다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