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스님─착한 일 행해서 그 마음을 맑게하라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053회 작성일 14-06-04 15:05본문
착한 일 행해서 그 마음을 맑게하라 !!
법정스님
그동안 잘 사셨습니까.
날씨가 이렇게 좋은데 단풍구경들 가지 않고 절에 오셨습니다.
봄에는 꽃구경가고 가을에는 단풍구경갈 수 있다는 마음의 여유가 그래도 아직 다행입니다.
세상사는데 바빠서 꽃구경이든 단풍구경이든 전혀 기회도 관심도 없는 경우는 없다 합니다.
계절은 바뀝니다.
오늘 날씨가 화창하고 언제 날씨가 흐려질지는 알 수 없습니다.
계절은 이렇게 어김없이 우주질서에 따라서 오고 가는데 인간사, 사람의 일은 예측할 수 없습니다.
미국테러사건 이례 세상은 얼마나 거칠고 어지럽습니까.
밀가루 때문에 공포에 떨고 있지요.
이것이 사람의 일- 입니다.
사람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유독가스는 누가 만들어 냈습니까.
사람이 사람을 해치기 위해서 만들은 것입니다. 그것도 후진국에서 만들은 것이 아닙니다.
선진국에서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결국 우리 자신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하는 일을 거듭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절에서 나왔을 때 전시회를 하나 보았습니다.
우리 마당에 관음상을 조각하신 최종태 화백 칠순 기념전시회였습니다.
최 화백과 대화중에 최 화백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20세기 미술사에서 아주 뚜렸한 주목할만한 사실이 있습니다.
지난 100년 동안 인간의 형상이 그려지지 않고 자연의 형상도 사라졌다고 합니다.
저는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물론 소수의 예술가들이 인간을 그렸습니다만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인간과 자연을 소외시켰다고 합니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가들이 자기 작품세계에서 인간과 자연을 도외시킨 것은 심상치 않은 일 입니다.무엇인가 망식하고 있습니다.
풍경화를 그리는 화가가 있었는데 이 분의 그림에는 집과 거리만 있섰지 그의 사람이 없답니다.
예전, 동양화나 서양화나 자연과 사람이 서로 어울려 그려져 있습니다.
아름다움을 지향하는 에술세계에서 인간과 자연이 사라졌다는 것은 큰 충격입니다.
하나의 도구처럼 인체를 다루었지 인간은 다루지 않았다는 것은 인간 부재의 예술이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 곰곰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람은 홀로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가끔 저를 만난 신도들이 저에게 어찌 혼자 사느냐고 묻지마는 저가 어째 혼자 삽니까.
여러분들과 이렇게 이야기 하고 관계를 갖고 있지 않습니까.
한 때 시간적 공간적으로 떨어져 있다고 해서 혼자 사는 것이 아닙니다.
무수한 관게 속에서 어울려 살고 있습니다.
한자로 사람 인 자를 보십시오.
어느 한 쪽만 가지고서는 서 있을 수 없습니다. 존재할 수 없습니다.
서로 기대고 의지하고 있으므로 서 있을 수 있습니다.
지, 수, 화, 풍 . 나무, 새, 짐승 이와 같은 생명들과 어울려 있으므로 크다란 생명의 흐름을 이루고 있습니다.
우주 만물의 그 중에 하나가 사람입니다. 큰 생명의 흐름을 이루고 있지요.
그런데 근대 과학에서 부분에만 집착한 나머지 서로의 공생 공존하는 전체를 망각하고 있지요.
공생 공존하는 틀이 깨졌습니다.
농경사회에서는 서로 의지하고 살았습니다. 기술사회, 즉 산업사회에서 서로 공생 공존하는 틀이 깨지므로 생명의 위기를 불러일으키고 있지요.
기능과 조화가 이루어진 생명의 흐름을 무너뜨린 결과 거친 폭력으로서 위기가 닥쳐왔습니다.
21세기는 어떤 관점에서 폭력의 시대입니다.
저마다 이기적인 인간이 되어서 나만 생각하고 남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성급하고 조급해서 참고 기다릴줄 모릅니다.
무엇이든 뜸도 드리기 전에 즉석에서 해결하고자 합니다.
즉 교통사고나 급진한 이혼율도, 참고 기다릴줄 모르고 성급하게 즉석에서 해결하고자 하는 결과 입니다.
복잡다단한 관계가 어떻게 즉석에서 해결됩니까.
그래서 가상세계가 가상세계에서 그치지 않고 현실세계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뉴스로 통해서 알고 계시겠지만-
철이 없는 사람이 아닌 30대의 사람이 컴퓨터게임에 열중한 나머지 게임에 번번히 패하자 상대방을 찾아가 폭력을 행하는가 하면 고등학생이 평소 자신을 괴롭히던 같은 반 친구를 수업시간에 살해한 것도 이런 경우입니다.
폭력영화를 40번인가 400번 보았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런 것을 보는 순간에 폭력의 업이 몸에 베입니다. 우리가 보고 듣는 사이에 씨를 심는 것입니다.
좋은 것을 보고 들으면 좋은 씨앗을 나쁜 것을 보고 들으면 어두운 씨앗을 심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우리 몸에 쌓입니다.
흥행에 성공했다는 영화 쉬리, 친구, 조폭아줌마인지, 마누라인지 흥행에 성공했는지 모르지만 결과는 지나 보아야 합니다.
우리 정서에 미치는 영향은, 폭력에 억압당한 분은 대리만족을 느껴 적당한 배설작용을 하여 쾌감을 맛볼런지 모르지만 멀쩡한 사람의 정서에는 거친, 나쁜 영향을 끼칩니다.
신문, 방송에서 좋지 않는 것을 보게 되면 우리 심성에 필름이 찍힙니다.
우리가 말하고, 보고, 듣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업이 됩니다.
기억은 우리의 잠재의식입니다. 찌르고 죽이고 하는 이런 장면을 즐기게 되면 우리의 마음밭에 그와 같은 씨앗을 뿌립니다.
잠재의식의 씨앗이 어떤 상황을 만나면 자가 자신도 예상 못했던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이것이 업의 결과이고 흐름입니다.
이번 미국테러사건도 아프칸의 폭력범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컴퓨터, 소설, 영화가 때려부시고,불질러지고, 파괴하고하는 것들.
헐리웃에서 만들어진 영화들이 때리고 부시고 죽이고 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것이 업의 결과이고 흐름입니다.
우리도 그런 영상을 보게 되면 쌓이고 쌓여서 업이 됩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회교권 사이에도... 미국 정치 경제를 쥐고 있는 유태인들이 이스라엘 쪽 편만 드니 아랍권사람들은 얼마나 피눈물을 흘렸겠습니까. 그런 암시가 업이 되어 사건이 터진 것입니다.
아이들이 컴퓨터게임에서 치고 받고, 짓밟고 하는 것을 하면 이것이 필름이 되어 아들의 잠재의식에 찍히여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어른도 마찬가지 입니다.
뉴스에서 뉴욕무역센터가 폭격당하는 장면을 보면서 아랍권이 박수치는 것을 보면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 그런 감정에 익숙해왔던 업입니다.
이런 것도 시청하면서 삼키고 있는 것입니다.
업이란 순간, 하루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내 자신의 삶이 우리 공동체 생활에 영향을 끼칩니다.
어느 대학교수의 글에서 읽은 것입니다.
한 남학생이 여학생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서로 팔짱을 끼고 다닐 정도의 가까워졌습니다.
그런데 한 학기도 채우기 전에 그 여학생은 다른 남학생이 좋다고 가버렸습니다.
다른 놈하고 다니는 것을 본 이 남학생의 상처가 엄청났을 것입니다.
남학생의 어머니는 자기 아들이 실연하여 밤잠을 설치고 식음을 전패하는 것을 보면서 또 아들은 어머니 앞에 아무런 표정없이 있는 것을 본 어머니가 얼마나 안스러웠겠습니까.
마침 학생의 어머니는 교수의 학교 동기생이라 편지를 썻습니다.
사랑을 버린 죄가 이렇게 큰지 몰랐다.
학생의 어머니는 그 당시 민주화운동권 학생과 열열히 연애를 했다.
그러자 졸업과 동시에 조건이 좋은 남학생과 결혼했다.
버림받은 남학생은 상처가 크서 자살일보직전에 있다가 외국유학을 갔다.
그런데 자기의 아들이 실연을 당한 그 여학생은 예전 자기가 사귀던 그 남자의 딸 이었다.
이것이 인생살이 입니다. 인생은 드라마입니다.
업의 파장입니다. 인과 응보의 고리. 이면을 보면 인과 관계가 고리가 이어져 있습니다.
내가 저지른 것이 나만 아니라 내 자식에게 까지 업의 파장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와같이 세상에 일으나고 있는 모든 사건과 사고는 인과관계의 고리가 얽혀 있습니다.
현재의 우리나라 정치판도 동쪽 서쪽 하면서 싸워 우리국민에게 상처를 주고 있습니다.
이것도 조선조부터 당쟁의 원인입니다.
미국의 테러도 이스라엘을 편든 것에 대한 미국에 대한 원한이 쌓이고 쌓여서 인과 응보의 고리입니다.
나쁜짓 하지 말고
착한 일 두루 행해서
그 마음을 맑게 가져라.
모든 성현의 가르침입니다.
폭력과 인간부재의 시대에 사람답게 살아가려면 인과의 도리를 알아야 합니다.
막된짓 하는 사람은 인과의 도리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모든 것이 넘치는 이런 세상에서는 투철한 자기 삶의 질서가 있서야 합니다.
불필요한 것에서 자제할 줄 알고 억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업은 그당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다음 결과를 낳는 것입니다.
오늘 어떤 업을 짓는가 내일의 나를, 내가 오늘 있는 것은 지금까지 쌓아온 업의 연장입니다.
보지 않아도 될 것은 보지 말고
듣지 않아도 될 소리는 듣지 말고
먹지 않아도 될 음식은 먹지 말고
읽지 않아도 될 글은 읽지 말라
옷이나, 가무, 만나는 친구, 전화통화도 마찬가지 될 수 있는한 적게 보고, 적게 듣고, 적게 먹고, 적게 갖고, 적게 걸치고, 적게 말을 하면 업의 덫에 걸릴 확율이 낮아집니다.
이것을 소극적인 생활태도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지혜로운 삶의 선택입니다.
스스로 자기의 삶을 규제해야 합니다.
모든것이 넘치니까 스스로 방어막이 없으면 폭력이 안에 까지 밀려듭니다.
그렇지 않으면 덫에 걸려 듭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원인이 무엇입니까. 좀 더 의미 있는 삶을 누리기 위해, 순간 순간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고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만나고 어떤 앵동을 하는가 입니다.
끝으로 이야기 하나 하지요
맑고 향기롭게에서 봉사활동하고 있는 대비양노원에서 일입니다.
5년전에 할머니 한 분이 들어왔는데 이 할머니는 17세에 결혼하여 아이를 못났는다고 20세 중반에 소박을 맞았습니다.
지금은 위자료가 있지만 그당시는 그런 것이 없던 시절이라 이 할머니는 나올 때 돈을 훔쳐 나왔습니다. 항상 마음에 가책을 느끼고 있었지요.
일년 전에 할아버지 한 분이 양노원으로 들어왔는데 예전 남편이었습니다.
행인지 불행인지 그 할아버지는 치매가 있서 할머니를 못알아 보았지요.
할머니는 마주치는 것을 피했습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되자 원장이 권하여 할아버지 임종을 지켰는데 그때 할아버지 정신이 들어 할머니를 알아보시고 사과를 하고 내 마지막을 지켜주어서 고맙다는 표시를 했습니다.
한번 만났던 사람은 또 만나게 됩니다.
외나무 다리건 양노원이 됬던 또 만납니다. 이것이 인연의 끄나풀입니다.
하루를 살아가는데 설사 마땅치 않더라도 개선해야 됩니다.
늘 상황에 맞딱드리더라도 이 다음에 올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좋은 인연을 맺기 바랍니다.
2001년 10월 21일 관리자 - 법문 정리
법정스님
그동안 잘 사셨습니까.
날씨가 이렇게 좋은데 단풍구경들 가지 않고 절에 오셨습니다.
봄에는 꽃구경가고 가을에는 단풍구경갈 수 있다는 마음의 여유가 그래도 아직 다행입니다.
세상사는데 바빠서 꽃구경이든 단풍구경이든 전혀 기회도 관심도 없는 경우는 없다 합니다.
계절은 바뀝니다.
오늘 날씨가 화창하고 언제 날씨가 흐려질지는 알 수 없습니다.
계절은 이렇게 어김없이 우주질서에 따라서 오고 가는데 인간사, 사람의 일은 예측할 수 없습니다.
미국테러사건 이례 세상은 얼마나 거칠고 어지럽습니까.
밀가루 때문에 공포에 떨고 있지요.
이것이 사람의 일- 입니다.
사람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유독가스는 누가 만들어 냈습니까.
사람이 사람을 해치기 위해서 만들은 것입니다. 그것도 후진국에서 만들은 것이 아닙니다.
선진국에서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결국 우리 자신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하는 일을 거듭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절에서 나왔을 때 전시회를 하나 보았습니다.
우리 마당에 관음상을 조각하신 최종태 화백 칠순 기념전시회였습니다.
최 화백과 대화중에 최 화백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20세기 미술사에서 아주 뚜렸한 주목할만한 사실이 있습니다.
지난 100년 동안 인간의 형상이 그려지지 않고 자연의 형상도 사라졌다고 합니다.
저는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물론 소수의 예술가들이 인간을 그렸습니다만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인간과 자연을 소외시켰다고 합니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가들이 자기 작품세계에서 인간과 자연을 도외시킨 것은 심상치 않은 일 입니다.무엇인가 망식하고 있습니다.
풍경화를 그리는 화가가 있었는데 이 분의 그림에는 집과 거리만 있섰지 그의 사람이 없답니다.
예전, 동양화나 서양화나 자연과 사람이 서로 어울려 그려져 있습니다.
아름다움을 지향하는 에술세계에서 인간과 자연이 사라졌다는 것은 큰 충격입니다.
하나의 도구처럼 인체를 다루었지 인간은 다루지 않았다는 것은 인간 부재의 예술이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 곰곰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람은 홀로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가끔 저를 만난 신도들이 저에게 어찌 혼자 사느냐고 묻지마는 저가 어째 혼자 삽니까.
여러분들과 이렇게 이야기 하고 관계를 갖고 있지 않습니까.
한 때 시간적 공간적으로 떨어져 있다고 해서 혼자 사는 것이 아닙니다.
무수한 관게 속에서 어울려 살고 있습니다.
한자로 사람 인 자를 보십시오.
어느 한 쪽만 가지고서는 서 있을 수 없습니다. 존재할 수 없습니다.
서로 기대고 의지하고 있으므로 서 있을 수 있습니다.
지, 수, 화, 풍 . 나무, 새, 짐승 이와 같은 생명들과 어울려 있으므로 크다란 생명의 흐름을 이루고 있습니다.
우주 만물의 그 중에 하나가 사람입니다. 큰 생명의 흐름을 이루고 있지요.
그런데 근대 과학에서 부분에만 집착한 나머지 서로의 공생 공존하는 전체를 망각하고 있지요.
공생 공존하는 틀이 깨졌습니다.
농경사회에서는 서로 의지하고 살았습니다. 기술사회, 즉 산업사회에서 서로 공생 공존하는 틀이 깨지므로 생명의 위기를 불러일으키고 있지요.
기능과 조화가 이루어진 생명의 흐름을 무너뜨린 결과 거친 폭력으로서 위기가 닥쳐왔습니다.
21세기는 어떤 관점에서 폭력의 시대입니다.
저마다 이기적인 인간이 되어서 나만 생각하고 남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성급하고 조급해서 참고 기다릴줄 모릅니다.
무엇이든 뜸도 드리기 전에 즉석에서 해결하고자 합니다.
즉 교통사고나 급진한 이혼율도, 참고 기다릴줄 모르고 성급하게 즉석에서 해결하고자 하는 결과 입니다.
복잡다단한 관계가 어떻게 즉석에서 해결됩니까.
그래서 가상세계가 가상세계에서 그치지 않고 현실세계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뉴스로 통해서 알고 계시겠지만-
철이 없는 사람이 아닌 30대의 사람이 컴퓨터게임에 열중한 나머지 게임에 번번히 패하자 상대방을 찾아가 폭력을 행하는가 하면 고등학생이 평소 자신을 괴롭히던 같은 반 친구를 수업시간에 살해한 것도 이런 경우입니다.
폭력영화를 40번인가 400번 보았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런 것을 보는 순간에 폭력의 업이 몸에 베입니다. 우리가 보고 듣는 사이에 씨를 심는 것입니다.
좋은 것을 보고 들으면 좋은 씨앗을 나쁜 것을 보고 들으면 어두운 씨앗을 심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우리 몸에 쌓입니다.
흥행에 성공했다는 영화 쉬리, 친구, 조폭아줌마인지, 마누라인지 흥행에 성공했는지 모르지만 결과는 지나 보아야 합니다.
우리 정서에 미치는 영향은, 폭력에 억압당한 분은 대리만족을 느껴 적당한 배설작용을 하여 쾌감을 맛볼런지 모르지만 멀쩡한 사람의 정서에는 거친, 나쁜 영향을 끼칩니다.
신문, 방송에서 좋지 않는 것을 보게 되면 우리 심성에 필름이 찍힙니다.
우리가 말하고, 보고, 듣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업이 됩니다.
기억은 우리의 잠재의식입니다. 찌르고 죽이고 하는 이런 장면을 즐기게 되면 우리의 마음밭에 그와 같은 씨앗을 뿌립니다.
잠재의식의 씨앗이 어떤 상황을 만나면 자가 자신도 예상 못했던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이것이 업의 결과이고 흐름입니다.
이번 미국테러사건도 아프칸의 폭력범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컴퓨터, 소설, 영화가 때려부시고,불질러지고, 파괴하고하는 것들.
헐리웃에서 만들어진 영화들이 때리고 부시고 죽이고 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것이 업의 결과이고 흐름입니다.
우리도 그런 영상을 보게 되면 쌓이고 쌓여서 업이 됩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회교권 사이에도... 미국 정치 경제를 쥐고 있는 유태인들이 이스라엘 쪽 편만 드니 아랍권사람들은 얼마나 피눈물을 흘렸겠습니까. 그런 암시가 업이 되어 사건이 터진 것입니다.
아이들이 컴퓨터게임에서 치고 받고, 짓밟고 하는 것을 하면 이것이 필름이 되어 아들의 잠재의식에 찍히여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어른도 마찬가지 입니다.
뉴스에서 뉴욕무역센터가 폭격당하는 장면을 보면서 아랍권이 박수치는 것을 보면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 그런 감정에 익숙해왔던 업입니다.
이런 것도 시청하면서 삼키고 있는 것입니다.
업이란 순간, 하루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내 자신의 삶이 우리 공동체 생활에 영향을 끼칩니다.
어느 대학교수의 글에서 읽은 것입니다.
한 남학생이 여학생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서로 팔짱을 끼고 다닐 정도의 가까워졌습니다.
그런데 한 학기도 채우기 전에 그 여학생은 다른 남학생이 좋다고 가버렸습니다.
다른 놈하고 다니는 것을 본 이 남학생의 상처가 엄청났을 것입니다.
남학생의 어머니는 자기 아들이 실연하여 밤잠을 설치고 식음을 전패하는 것을 보면서 또 아들은 어머니 앞에 아무런 표정없이 있는 것을 본 어머니가 얼마나 안스러웠겠습니까.
마침 학생의 어머니는 교수의 학교 동기생이라 편지를 썻습니다.
사랑을 버린 죄가 이렇게 큰지 몰랐다.
학생의 어머니는 그 당시 민주화운동권 학생과 열열히 연애를 했다.
그러자 졸업과 동시에 조건이 좋은 남학생과 결혼했다.
버림받은 남학생은 상처가 크서 자살일보직전에 있다가 외국유학을 갔다.
그런데 자기의 아들이 실연을 당한 그 여학생은 예전 자기가 사귀던 그 남자의 딸 이었다.
이것이 인생살이 입니다. 인생은 드라마입니다.
업의 파장입니다. 인과 응보의 고리. 이면을 보면 인과 관계가 고리가 이어져 있습니다.
내가 저지른 것이 나만 아니라 내 자식에게 까지 업의 파장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와같이 세상에 일으나고 있는 모든 사건과 사고는 인과관계의 고리가 얽혀 있습니다.
현재의 우리나라 정치판도 동쪽 서쪽 하면서 싸워 우리국민에게 상처를 주고 있습니다.
이것도 조선조부터 당쟁의 원인입니다.
미국의 테러도 이스라엘을 편든 것에 대한 미국에 대한 원한이 쌓이고 쌓여서 인과 응보의 고리입니다.
나쁜짓 하지 말고
착한 일 두루 행해서
그 마음을 맑게 가져라.
모든 성현의 가르침입니다.
폭력과 인간부재의 시대에 사람답게 살아가려면 인과의 도리를 알아야 합니다.
막된짓 하는 사람은 인과의 도리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모든 것이 넘치는 이런 세상에서는 투철한 자기 삶의 질서가 있서야 합니다.
불필요한 것에서 자제할 줄 알고 억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업은 그당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다음 결과를 낳는 것입니다.
오늘 어떤 업을 짓는가 내일의 나를, 내가 오늘 있는 것은 지금까지 쌓아온 업의 연장입니다.
보지 않아도 될 것은 보지 말고
듣지 않아도 될 소리는 듣지 말고
먹지 않아도 될 음식은 먹지 말고
읽지 않아도 될 글은 읽지 말라
옷이나, 가무, 만나는 친구, 전화통화도 마찬가지 될 수 있는한 적게 보고, 적게 듣고, 적게 먹고, 적게 갖고, 적게 걸치고, 적게 말을 하면 업의 덫에 걸릴 확율이 낮아집니다.
이것을 소극적인 생활태도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지혜로운 삶의 선택입니다.
스스로 자기의 삶을 규제해야 합니다.
모든것이 넘치니까 스스로 방어막이 없으면 폭력이 안에 까지 밀려듭니다.
그렇지 않으면 덫에 걸려 듭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원인이 무엇입니까. 좀 더 의미 있는 삶을 누리기 위해, 순간 순간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고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만나고 어떤 앵동을 하는가 입니다.
끝으로 이야기 하나 하지요
맑고 향기롭게에서 봉사활동하고 있는 대비양노원에서 일입니다.
5년전에 할머니 한 분이 들어왔는데 이 할머니는 17세에 결혼하여 아이를 못났는다고 20세 중반에 소박을 맞았습니다.
지금은 위자료가 있지만 그당시는 그런 것이 없던 시절이라 이 할머니는 나올 때 돈을 훔쳐 나왔습니다. 항상 마음에 가책을 느끼고 있었지요.
일년 전에 할아버지 한 분이 양노원으로 들어왔는데 예전 남편이었습니다.
행인지 불행인지 그 할아버지는 치매가 있서 할머니를 못알아 보았지요.
할머니는 마주치는 것을 피했습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되자 원장이 권하여 할아버지 임종을 지켰는데 그때 할아버지 정신이 들어 할머니를 알아보시고 사과를 하고 내 마지막을 지켜주어서 고맙다는 표시를 했습니다.
한번 만났던 사람은 또 만나게 됩니다.
외나무 다리건 양노원이 됬던 또 만납니다. 이것이 인연의 끄나풀입니다.
하루를 살아가는데 설사 마땅치 않더라도 개선해야 됩니다.
늘 상황에 맞딱드리더라도 이 다음에 올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좋은 인연을 맺기 바랍니다.
2001년 10월 21일 관리자 - 법문 정리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