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범스님─ 학인과 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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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344회 작성일 14-06-04 15:05본문
종범스님- 학인과 도인
학인(學人)이라고 하면 배우는 사람이고, 도인(道人)이라고 하면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이다. 무엇을 실행하고 무엇을 배우는가. 도(道)자가 들어있음을 알 수 있다.
원래는 학도(學道)라 하여 도를 배우는 사람이라는 뜻인데 도를 생략하여 학인이라고 하는 것이다. 또 도인은 행도인(行道人)이라 하여 도를 실행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옛날에는 학인이라는 말을 사원이나 선원 등에서 많이 사용하였다. 근래에 와서는 학인이라는 말을 강단이나 강원, 학교 등에서 많이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기록을 보면 도를 배우는 사람은 모두가 학도인이다. 또 도(道)라는 말은 선(禪)과 같이 사용할 수도 있기 때문에 학선인(學禪人)이라는 말도 사용하였다.
그렇다면 도는 무엇인가. 도는 진리이다. 그렇다면 진리는 또 무엇인가.
우리의 말 속에 보면 말에도 길이 있는데 그것을 논리(論理)라고 한다. 또한 사물에는 물리(物理)가 있으고, 무슨 일을 해나가는 데에는 사리(事理)가 있으며, 생각을 하는 데에는 심리(心理)가 있다.
그렇다면 진리는 무엇인가. 논리, 심리, 사리 등을 진리라 할 수는 없다. 진리를 말로 표현하면 논리가 되고, 일로 표현하면 사리가 되고, 생각으로 표현되면 심리가 된다. 그러나 논리, 사리, 심리가 아니면서 뭔가를 터득하는 것이 진리이다.
사람은 흔히 논리를 진리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진리라고 설명하는 것은 논리일 뿐이지만 자신 스스로도 진리인양 속고 상대방도 속이려 드는 것이다. 논리와 진리, 사리와 진리, 심리와 진리는 다른 것이다.
“도가 무엇인가”하고 많이 묻지만 도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대답을 하면 이미 말이 되어버리고 만다. 도란 다른 것이 아니라 말을 하고 말을 듣는 것이다. 말을 하고 듣는 가운데에 모든 일이 다 벌어진다. 말을 하는 사람이 똑 같은 말을 해도 전부 다르고, 말을 듣는 사람이 똑 같은 말을 들어도 전부 다르다.
말을 하고 말을 듣는 것이 바로 진리이다. 이것을 길이라고 하는데 옛 글에 보면 도에 대한 문답이 많이 있다.
“도가 무엇입니까”라는 물음에 “도는 담 너머에 있다.”라고 대답하자. “그 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대도(大道)를 묻는 것입니다.”라고 하자 “대도는 장안(長安)으로 통한다.”라고 대답하였다 한다.
장안은 중국의 수도였고 큰길은 수도로 통한다는 뜻이다. 이렇듯 논리가 아니면서 도를 설명한 내용이다.
또 “도가 무엇입니까?”라는 물음에 “평상심이 도니라.”라고 하였다 한다. 마조선사의 어록중 평상심에대한 말씀이다. 평상심은 조작이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일부러 만드는 것은 진리일수 없는 것이다.
어떤 정신과의사가 치료를 하기위해 환자를 만났는데 그 환자는 미소가 굉장히 잘 발달되어있었다. 그래서 그 미소가 언제부터 발달되었는가를 묻자 대학 재학시에 발달된 것 같다고 하였다. 왜 그런지는 본인도 잘 몰랐지만 치료를 하다 보니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화를 감추기 위해서 미소를 배우게 된 것임을 알게 되었다.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감추기 위해서 쓸데없는 미소를 짓는다. 논어에 교언영색(巧言令色)이라는 말이 있다. 말을 꾸며서 하고 얼굴빛을 꾸며서 나타내는 사람 중에는 어진 이가 없다고 하였다.
조작이 없는 평상심이 도이다. 조작이라고 하는 것은 물드는 것이다. 오염이 없는 것이 조작이 없는 것이다. 중생들은 자꾸 마음이 물든다. 공연히 미워하고 공연히 걱정하며 제 마음을 제 마음대로 가지고 있지 못한다. 지나간 일에 매이지 않고 다가올 일을 걱정하지 않고 오늘 할일을 하고 하지 말 일을 하지 않는 것이 평상심이다.
도라는 것은 멀리 무엇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물들지 않고 스스로 더럽혀지지 아니한 자기의 모습이다.
그런데 평상심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늘 하루하루 반복되는 마음을 평상심으로 아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평상심이 아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되풀이 되는 망상심이다.
도를 배우고 도를 실천하는 것이 행도인이고 학도인이다. 이것을 줄여서 학인, 도인이라고 한다.
도를 배우려면 첫째, 관자재학습(觀自在學習)을 하여야 한다. 보는 것을 잘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관자재보살이 있듯 보살에는 결과를 그대로 실행하는 행도인도 되고 원인을 닦아가는 학도인도 된다. 그러므로 보살에는 학생도 있고 교수도 있다. 이것을 인행보살(因行菩薩) 과행보살(果行菩薩)이라 한다. 부처님도 보살이 되고 지금 발심해서 시작하는 사람도 보살이 되는 것이다.
가령 그릇을 예로 들면, 그릇은 그릇이다.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 보면 그 그릇은 흙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흙이냐 그릇이냐를 생각하게 된다. 또 이 그릇은 흙을 빚어서 만들었으므로 만든 사람의 솜씨와 생각이 들어있는 것이다. 재료인 흙은 그릇으로 만들기 이전부터 있었던 것인데 언제부터 있었던 것인가. 수억만년 전부터 있었던 것이다. 이런 것을 모두 함께 보는 것이 관자재하게 보는 것이다. 또 깊이 보면 이것이 완전하게 있는 것도 아니고 완전하게 없는 것도 아니다. 모든 것을 한꺼번에 보는 것이 관자재하게 보는 것이다.
관자재는 관색관공(觀色觀空), 관자관타(觀自觀他) 색도 보고 공도 보고, 나도 보고 상대방도 보는 것이다. 보통은 그릇이라는 색만 보고 공을 보지 못한다. 자신은 보지만 상대를 보지 못한다.
우리가 흔히 대화를 한다고 할 때, 나한테 이해가 되는 것만 듣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듣지 않는다. 그러므로 결국은 자신의 소리를 자신이 들을 뿐 상대의 소리는 들리지 않는 것이다.
한눈에 다 보게 되면 걱정할 일이 전혀 없는데 하쪽만 보게 되면 걱정이 생겨난다. 이것이 조작이다. 걱정하는 것을 보면 한쪽으로 치우쳐있음을 알게 된다. 마음이 매어있고 끌려가기 때문에 스스로 마음에 독립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마음이 독립되어야 편안한데 매어있기 때문에 편안할 수 없는 것이다.
도가 무엇인가를 물어도 도를 아는 사람은 도에 대하여 논리로 대답할 생각은 하지 않는다. 말로 설명하면 그것은 논리일 뿐 도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죽은 말이라 하여 사구(死句)라고 한다. 산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산을 그려서 보여주었다면 그것은 그림일 뿐 산은 아닌 것이다. 산을 알려주려면 실제로 산을 보여주는 것이 올바로 알려주는 것이다. 그것이 살아있는 말인 활구(活句)이다.
‘도가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에도 여러가지 의미가 있다. 어떤 사람은 “당신이 도가 무엇인지 아느냐?라고 분노에 찬 질문이 있고, “과연 도를 배우고자 하면 배울 수는 있습니까?”라는 낙담하여 질문하는 경우고 있고, “이 바쁜 세상에 도 배울 시간이 어디에 있느냐”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질문에 대한 대답에 급급해하지 말고 묻는 사람의 마음을 정확히 헤아리는 것이 도에 들어가는 길이다. 질문을 알아야 답을 할 수 있다.
예전에 어떤 도인이 강의를 잘 하는 강주스님을 만났는데 어떤 경을 강의하는가를 묻자 강주스님은 유식론(唯識論)을 강의한다고 하였다. 도인이 다시 유식이 무엇이냐고 묻자 강주스님은 “삼계가 유심(三界唯心)이요 만법이 유식(萬法唯識)이라”하였다. 그러자 도인은 옆에 쳐놓은 발을 가리키며 “저것은 무슨 법입니까?”라고 묻자 “저것은 색법(色法)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도인은 “대 강백께서 어찌 오계(五計)도 못지키십니까?”하였다.
오계라 함은 살,도,음,망,주를 말한다. 오계를 지키지 못했다는 것은 그 중 망어를 하였다는 것인데, 삼계가 오로지 마음 뿐이고 식 뿐이라고 하였는데 색을 말하였으니 망어를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도인의 말에도 허물은 있는데, 왕은 알았지만 백성은 몰랐던 것이다. 그 땅에 왕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백성도 있는 것이다. 삼계가 유심이고 만법이 유식이라 하였으면 색법도 유심이고 공법도 유심이고 일체법이 다 유심인데 색법이라고 한들 따로 있지는 않은 것이다.
이처럼 보기를 잘 보아야 한다. 잘 보면 걸릴 것이 없다. 자기가 헛것을 보아 망견 망상에 빠져서 관자재를 하지 못하는 것이다. 누가 나에게 고통을 주고 걱정을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잘못 보고 잘못 생각해서 고통을 받는 것이다. 깊이 보고 넓게 보고 진실하게 보면 걱정 근심할 것이 전혀 없다.
현재에 할 것을 하고 하지 않을 것은 하지 않고 살면 관자재가 사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관세음(觀世音)이 된다. 세상의 소리란 다른 사람의 소리이다. 다른 사람의 소리를 눈에 보는 것처럼 깊이 듣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관자재보살 관세음보살이다.
배움이란 관세음을 배우고 관자재를 배우는 것이다. 누가 무슨 소리를 하면 그 소리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것을 깊이 들을 수 있으면 관계는 좋아진다. 하지만 그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이다.
도를 깨달은 사람들 중에는 바람소리를 듣고, 물소리를 듣고도, 닭 우는 소리를 듣고도, 자신의 손바닥을 보고도 깨달았다 한다. 모든 것이 다 도인데 허망하게 보는 망견과 허망하게 생각하는 망상에 빠져서 도를 보지 못할 뿐이다.
북한산에 올라가서 북한산을 보지 못하고 북한산이 어디인지를 묻는 것과 같은 것이다. 북한산이 무엇인가를 물었을 때 누군가가 북한산을 그려서 주었다고 하자. 그려진 북한산은 무엇이 도인가라는 물음에 말로 대답 해준 것과 같다. 그려진 북한산은 실로 북한산이 아닌데 그 그림을 북한산이라 믿는 것은 무엇이 도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인 그 말이 도가 아닌데 그것을 도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스스로 보고 스스로 듣는 능력을 키워나가야 한다. 그것이 학인이다. 그러면 저절로 도를 실행하게 되는데 그것이 도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망상을 줄이고 본래의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본래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면 또 어떻게 해야 본래의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는가를 걱정하는 사람이 있다. 마음을 쉬라고 하면 어떻게 마음을 쉴 수 있는지 고민한다. 그래서는 쉴 수 없다.
한국의 경전중에 간단하고도 중요한 경전이 있는데 반야심경과 법성게이다. 반야심경은 모두 270자로 되어있고 법성게는 210자로 되어있다. 그러나 모든 진리가 그 속에 다 들어있다. 이러한 경전을 계속 읽고 외우다 보면 쓸데없는 망상이 점점 줄어들 것이다.
쓸데없는 걱정에 매여서 괴로운 것이지 괴로울 것이 있어서 괴로운 것은 아니다. 예를 들자면 잠들어있는 사람이 꿈을 꾸면서 여러가지 복잡함이 있다면, 그 사람은 꿈을 꾸었기 때문에 복잡함이 생긴 것이지 잠이든 잠자리 자체에 복잡함이 있는 것은 아닌것이다. 도로 돌아가면 걱정할 것이 없는데 망상으로 돌아가서 걱정이 있는 것이다.
편안한 잠자리에 누워있는 것이 바로 자기 자신인데 꿈속의 매맞고 쫓기고있는 사람이 자신은 아닌 것이다. 잠든 사람의 속으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도이다. 잠든 사람의 속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경을 자꾸 읽는 것이다. 경은 잠에서 깨어난 이치를 말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30여년 전과 비교해보면 마음들이 많이 조급하고, 난폭하고, 거칠다. 그 원인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니 TV를 많이 보는 것이었다. 쓸데없는 것을 계속 보고있는데 그 속에는 좋은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독도 들어있다. TV에서는 악을 공격하는데 악에 대한소리를 듣고 복수하는 것을 보고 하다보면 어느 순간 악의 그림자가 마음속에 들어와 있게 된다. 자꾸 악을 키워가게 되는 것이다. 앞으로도 점점 더 불안감을 키워가게 될 것이다. 인터넷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공부를 하려는 사람은 TV와 인터넷을 멀리하여야 한다. 중요한 지식은 인터넷 속에 없다. 책을 보고 연구를 하여야 하는 것이다. 틱낫한 스님도 TV와 라디오를 멀리하라고 하였다. 오늘날의 문화가 사람의 마음을 들뜨게 하고 사람의 마음을 초조하게 만들고있다.
화초를 가꿀 때도 좋은 물을 주어야 잘 자라지 나쁜 물을 자꾸 준다면 잘 자랄 수 있겠는가.
우리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에 영향을 받는데 늘 TV만 보고있다면 그 마음이 편안할 수가 없다. TV를 보는 시간을 줄이고 경을 읽고 공부고 기도하는 시간을 늘여나가야 할 것이다. 우리의 마음을 점점 조용하고 맑게 하면 근심걱정 할 것이 없다.
자업자득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만 제대로 이해해도 불교를 다 이해하는 것이다. 좋은 학인이 되고 도인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근심걱정 없이 세세생생을 편안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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